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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흐린날 창덕궁의 대조전에서 순종의 아픔을 만나다.

by 신록둥이 2011. 4. 29.

 

 

 

      <창덕궁>

      친구랑 종로에 왔다가 지나던 길, 집에 일찍들 들어가기 싫어서 

      지나던 길에 있던 요 창덕궁과 창경궁을 들어 갔다.

      창경궁 포스팅은 그제 미리 올려 드렸고 오늘은 창덕궁의 봄 풍경을 올려 드린다. 

 

      창덕궁은 1405년(태종5년) 조선왕조의 이궁으로 지어 졌으며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해

      창경궁과 함께 동궐이라 불렸다

      임진왜란 당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광해군때에 다시 짖고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기까지

      정궁 역활을 하였다.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동안 임금들이 거쳐했던 궁궐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한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돈화문 (敦化門: 보물 383호)'


 

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년(태종12년) 처음 지어졌다.

지금의 돈화문은 1609년(광해군 원년) 다시 지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가지를 자유롭게 뻗고 있는 300~400년 수령의 회화나무는 천연기념물 제472호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창덕궁의 역사를 안고 살고 있는 나무들이다.

 

 

 

 

 

 

 

 

영어 안내를 받고 있는 외국인들~

 

 

 

 

 

 

 

 

 

 

 

 

 

 '진선'

 

현판글씨는 1999년 복원하면서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글을 새겨 넣었다

 

 

 

 '금천교 (錦川橋)'


금천교는 1411년(태종11년)에 축조된 돌다리이다.
조선의 궁궐에는 공통적으로 초입부에 풍수지리상 길한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위에 돌다리를 놓았다.

 

돈화문을 지나 처음 만나는 다리로 창덕궁을 통틀어 가장 오래 되었다.

세밀한 설계를 바탕으로 무지개 모양의 기둥이 600년을 잘 버텨내고 있다.

 

 

 

진선문을 들어서서 만나는 네모난 넓은 마당은

 즉위식이나 각종 큰 잔치 혹은

중대한 재판을 진행하던 곳으로, 곧 궁궐 안의 광장인 셈이다.

왕들은 이 마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인정문을 들어가 인정전 용상에 앉음으로써 왕이 되었다.

 

 

  ㅎㅎ....오늘 오전에 비가 내리더니 이렇게 뜰이 썰렁하다.

지난 가을 출사때는 관람객이 너무 많아서 좋은 장면 담으려고 많이 기다렸었는데....

 

 

'인정문 (仁政門: 보물 813호)'  

 

인정문에서 임금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는데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임금이 여기서 즉위했다.

 

 

오늘은 친구랑 지난 가을 단체출사로 내부 관람을 하지 못한

인정전과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 등을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의 시대로 들어가 본다.


 

 '인정전 (仁政殿: 국보 225호 )'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政殿)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가 행해진 궁궐의 대표적 공간이다.
이러한 행사 때에는 인정전 앞의 품계석에 맞춰 동쪽에는 문관이,

서쪽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도열했다.

 

 인정전의 편액은 검정 바탕에 흰 글씨로 양각되었고

 액자는 칠보문을 그렸다.

액자의 네 귀는 구름모양으로 조각되었고 현판의 글씨체는 “서영보”의 솜씨라 한다.


 

관람객이 너무 없어서 깜짝 놀랐다. 인정전을 오르면 안되나 하고....ㅎㅎ

 

 

 

 

 

 

 

요기는 일본인 관광객들을 안내해 주고 있다.

오늘은 내국인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주로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관광안내을 하고 있다.

 

 

 

 '인정전 내부 모습'

 

1908년 전기시설이 가설되면서 이곳에 전등이 설치되었다.

참 이색적인 풍경이다.

 

 

 

 

 

 

 

 

 

 

 '선정전 (宣政殿: 보물 814호)'


임금이 평소에 국사를 논의하던 편전(便殿)이다.
선정문을 들어서면 청기와 전각인 선정전이 있는데 광해군이

인정전과 선정전을 청기와로 하려다 사치한 궁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사관의 비판을 받았다는 '실록'의 기록도 있다.

 


 '선정전 뒤 뜰'

 

와 이곳은 꽤 넓은데....축구를 해도 되겠다....ㅎㅎ

후원의 나무들로 뜰 풍경이 한층 아름답다.

 

 

'선정전 뒷 모습' 

 

이 건물은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희정당 (熙政堂: 보물 815호)'

 

조선 연산군 2년(1496)에 수문당이라는 건물이 소실되어 이를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희정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임금의 침실이 딸린 편전이었는데, 나중에 어전회의실로 사용 되었다.
1917년 대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의 건물은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을 옮겨 지은 것이다.

 

 

 

 

 

 중건하면서 내부는 서양풍의 가구와 전등이 설치되고

 쪽널마루 위에 붉은 카펫으로 설치한 모습이 참으로 이색적인 풍경이다.

 

 

 

 

 

 

 

 '대조전 (大造殿: 보물 816호)'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왕비의 침전인 서온돌과

 임금의 침전인 동온돌로 나뉘어진다.

 

이 건물은 용마루가 없는데 이는 용으로 비유되는 임금이 잠자는 곳에 또
다른 용을 나타내는 용마루가 있으면 두 용이 충돌한다 하여 설치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1917년 이 건물이 불에 타자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을 옮겨다 지었다.

 

 명성왕후의 둘째 아들이며 조선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이

한일 합병조약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자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이 대신 서명하므로써 1910년 8월29일

조선왕조는 27대 519년 만에 막을 내리고,

 

순종은 '이왕'이란 직위를 받고 이곳 대조전에 머물다 1926년 53세로

치욕과 비운의 생을 마감한다. 

 
 


 

 

 

 

 

 

 '대조전에서 후원으로 통하는 문'

 

 

 

 

 

층층의 담장들이 멋스럽다~

 

 

 

 '희정당 앞'

 

 

 

'희정당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1920년 중건하면서 총독부와 일본인들이 맡아서 공사를 추진하다 보니 

건물이 난데없이 일본식 현관같이 두개가 튀어나와 있는 것이 다른 건물들과 비교해 

참 이질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희우루의 2층 누각'

 

뒤 '성정각'(세자의 교육장으로 쓰이다가 일제 강점기 때 내의원으로 쓰임)에

 동쪽으로 붙어 있는 누각인데 '보춘정'과 '희우루'란 현판이 두 개나 걸려 있다.

 

 

 

 

 

 

 

 

 

 

 

 

 

 

 

대조전을 둘러보고 나와서 

친구 왈, 왕족들이 추워서 이곳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단다.

자기는 바람 술술 들어오는 한옥(대조전이라도)에서는

추워서 못살겠단다....ㅎㅎ

맞다~나도 못 살것다....

 

그러니 마지막 왕족들은 얼마나 추웠을 고?

나라 빼앗기고 왕족들이 등따습고 배부르게 살아겠니??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강제합병 당하고

 조선을 일개 이씨의 나라(천황이 다스리는 여러 나라 중 하나)

이씨 조선(이조<李朝>)  '이왕(순종)'  으로 불리며

      조선총독부의 핍박 속에서  

살아도 죽은 듯 살았을 마지막 왕족들의 아픔이 전해와

이 흐린 봄날에 마음을 무겁게 했다.

 

 

 '매표소 앞의 오래 된 은행나무'

 

 

 

 

 *도움말 출처:다음검색,창덕궁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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