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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선묘낭자의 사랑이야기'와 '선비화'의 전설이 있는 '부석사'

by 신록둥이 2012. 4. 26.

 

 

 

의상스님을 사랑한 나머지 돌로 환생,

 부석사의 창건을 도운 당나라 여인 '선묘낭자'

'선비화' 설화의 '부석사(浮石寺)'

 

 

'석양빛에 물던 부석사'

 

 

부석사 오르는 길~

 

해가 뉘였뉘였 넘어가려는

오후 6시가 넘어서야 부석사 주차장에 들어섰더니

주차요금도 받지 않네~이레 고마울수가....

 

대신 부석사 오르는길에 할머님들이 파시던

민들레와 더덕, 달래, 머위나물 한 보따리를 같이 동행한 언니가 사 주셔서

일주일 내내 쌈싸묵고 생절이 해 묵고 데쳐묵고....

 

아~또 고 쌉싸름하고 향 찐하던 민들레와 달래나물이 그립군~

 

 

 

 

부석사 일주문~

 

 

부석사는 산허리를 휘감아 올라앉은 곳이라

오르막을 오르려면 숨이 헉헉 찬다. 

 

 

 

7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부석사 '당간지주'

 

 

 

 

'천왕문'

 

 

 

 

 

 

'천왕문'을 지나 또 저 높은 문을 하나 더 통과해야

'범종루'가 눈에 들어 온다.

다리가 불편하신분들은 천왕문 앞에서부터

계단이 아닌 옆 길로 오르시면 된다.

 

 

 

해가 곧 떨어질 것 같아서

서둘러 좌우의 '삼층석탑'과 '범종루'을 한장 담고

'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으로 올랐다.

 

 

 

 

 

 

 

국보 제17호인 '석등'의 화사석으로

석양 빛이 들어앉는다.

 

 

 

해질녘의 '무량수전'과 앞 뜰~

 

 

 

 

 

 

이렇게 해질녘에 둘러 본 부석사의 풍경은 처음이다.

 

황홀한 일몰풍경은 아니였지만,

은은한 석양빛을 받은 부석사 전경과 아래로 펼쳐진

소백산 자락의 너울이 한 폭의 그림을 만든다.

 

그리고 측면으로 틀어 앉은 범종루 앞,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후 6시 30분이면 있을 '법고 예불'?을 기다리고 있다.

 

 

 

 

'범종루'의 법고 예불시간~

 

황혼이 물든 저녁 산사,

세 분의 스님께서 두드리는 법고의 울림은

이제 모든 속세와의 인연을 접고 오로지 참선에만 정진하겠다는

만물들에게 전하는 메세지로 들려 온다.

 

 

 

 

 

만물을 고요히 흔들어 깨워 제자리에 서기를 바라며

마음의 평안과 위안을 얻게하는 이런 울림은

황혼에 평화롭게 울려퍼지는 성당의 종소리와도 흡사하다.

 

 

 

부석사에서의 일몰~

 

 

 

 

 

 

'무량수전과 석등'

 

 

 

 

 

 

 

 

 

한 무리의 사법연수생들이 문화해설사와 함께 올라

'선묘의 사랑이야기'와 '선비화'의 설화를 열심히 듣기에 우리도 옆에 앉아

재미나게 듣고 '선비화'가 있다는 '조사당'으로 같이 올라 보았다.

 

무량수전 뒤로 선묘낭자의 영정이 모셔진 '선묘각'도 보인다.

 

 

'무량수전' 우측길로 20~30m정도 오르면

의상스님을 기리는 국보 제19호인 '조사당(祖師堂)'이 나오는데

1.8m 높이의 축대에 '선비화(禪扉花)'라고 부르는

'골담초(骨擔草)' 한 그루가 철책속에 서 있다.

 

의상스님 지팡이 나무 '선비화'

 

의상스님께서 당에서 귀국하며

가지고 온 지팡이가 있는데 열반 하실 때,

“이 지팡이를 비와 이슬이 맞지 않은 곳에 꽂아 두면

 나무에 잎이 나고 꽃이 필 것이다. 그때는 국운이 흥할 것이다.”란

말씀에 지팡이를 조사당 축대에 꽂아 두었더니....잎이 나고 꽃이 피었는데,

국운이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꽃이 피지 않다가

해방 후에 다시 피기 시작했다고 한다.

약1,300년의 수령에 비와 이슬을 맞지 않는데도 

더 이상 자라지도 않고 사월 초파일에는 꽃을 피운다고....

 

노란꽃의 '선비화(골담초)'

 

 

골담초(선비화)의 잎은 자식을 못 낳는 여인에게는 자식을,

 아들을 못 낳는 여인들에게는 득남을 하게한다는 소문이 퍼져

몰래 잎을 따가 나뭇가지가 많이 훼손되자 

지금은 나무 훼손을 막기 위해 철책을 둘러 놓았다고 한다.

 

 

*선비화 사진과 도움말:다음검색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의 '배흘림 기둥'

 

의상스님께서 양양에 이어 두번째(676년)로 창건한 사찰로

입적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부석(浮石)'

 

저녁 7시 20분이 넘은 시간이라 사진이 나오질 않아

요렇게 한 장만 담았다.

 

신라왕족 신분으로 20세에 '경주 황족사'에 귀의한 의상스님은

26세에 원효스님과 함께 당나라 구법 유학길에 오른다.

 

폭풍우가 심하던날밤 무덤에서 해골물을 마시고 깨닭음을 얻은 원효스님은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먹기 나름이요. 만법이 오직 생각 탓으로 생기는 것이라.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는 것을 무엇 때문에 법을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노라." 유학을 포기하고 되돌아 갔지만

의상스님은 굳은 각오로 당나라로 향하였다.

 

'선묘낭자의 사랑이야기'

 

'선묘낭자'는 의상스님이 중국에 유학을 할 때 머물었던 집의 딸이었다.

선묘는 외모와 학식이 출중한 의상스님을 사모하여 같이 있길 바랬지만 이를 뿌리치고

화엄의 이치를 배워 의상스님은 선묘낭자가 자기를 뒤따라 올 것을 걱정하여

낭자에게는 알리지 않고 서둘러 귀국을 하였다.

이 사실을 안 낭자는 용이 되어 의상의 귀국을 돕겠다며 바다에 몸을 던진다.

후에 의상대사가 절을 세우려던 이 곳 터에 잡귀들이 패악을 부리며 방해하자,

용으로 변한 선묘가 다시 커다란 돌로 변하여 공중에 휘휘 떠다니자

잡귀들이 혼비백산 사라져 절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부석'이라는 절 이름도

이렇게 의상스님을 한 인간으로 연모한

당나라 처녀 '선묘의 애틋한 마음'이 깃들여 있다.

무량수전 북서쪽 모서리에는 선묘의 영정을 모신 작은 '선묘각'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선묘각'도 선비화로 유명한 '조사당'도 설화와 함께

이번에 처음으로 둘러 보았다.

 

 

 

 

저녁 예불에 들어간 '무량수전'

 

어둠에 휩싸인 고즈넉한 산사를 울리는

스님들의 독경소리를 뒤로하고

우리는 가로등 불빛을 의지삼아 부석사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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