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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비운의 왕 단종 능陵과 엄흥도 정여각이 있는 '영월 장릉莊陵'

by 신록둥이 2013. 6. 3.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영월 장릉'

 

 

지난 4월 28일 '영월 장릉'에서는 '조선시대 국장재현행사'가 있었다.

비운의 왕인 단종의 고혼과 충신들의 넋을 축제로 승화시킨 '제47회 단종문화제' 마지막 날의 행사로

조선의 27대 왕 중 유일하게 장례를 치르지 못한 단종의 장례를 위해

영월 군민 1,000여명이 발인행렬에 참여한 550년 만의 '조선시대 국장國裝재현'이었는데

그 행렬이 장릉에 도착하기 전 남편과 단종 능陵이 있는 구릉丘陵과 행사장 주변을 미리 둘러 보았다.

 

 

 

 

단종능陵 앞~

 

 

 

 

장릉(사적 196호, 세계유산) 매표소

 

단종문화제 마지막 날이었던 이날은

조선시대의 국장재현행사로 모두 무료입장을 할 수 있었다.

 

 

 

 

국장재현 행렬이 창절서원에서 노제의까지 지내고 이곳에 도착하려면

아직 1시간 이상은 기다려야 된 다고해서

우린 남편과 장릉을 미리 둘러보기 위해 단종 능으로 향했다.

 

 

 

국장재현 행렬을 보기위해 기다리는 관광객들~

 

 

 

 

박충원 낙촌비각(朴忠元, 駱村碑閣)

 

단종 능 오르는 계단의 우측으로 있는

이 비각은 박충원의 충신 됨을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1973년에 세운  것이다.

중신 박충원은 중종26년(1531)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사후에 문경공文景公 이란 시호를 받았다.
중종 11년(1516) 노산묘를 찾으라는 어명에 의하여 찾아 치제하였으나

그 후 방치되었던 묘를 중종 36년(1541)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의 현몽에 의해

봉축封築하고 전물奠物을 갖추고 제문을 지어 치제하였다 한다.


 

 

 

왕능 가는 길~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지게에 지고

선산인 이곳에 몰래 묻었던 곳에 그냥 능을 쓰다 보니

 평지에 위치한 다른 왕들의 능에 비해 좀 높은 구릉丘陵에 자리해 있다.

 

 

 

오르는 소나무 숲길이 참 예쁘다.

 

 

장릉의 유래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1441~1457)의 능,

단종의 이름은 홍위이며 문종의 아들로 세종23년(1441) 7월 23일에 태어나
세종30년(1448)에 왕세손 그리고 1450년에 7월 20일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그후 부왕인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승하하자

뒤를이어 12세의 어린 나이로 1452년 5월 18일 경복궁에서 즉위하였다.

 

 

 

 

설문지?를 작성중인 관광객들~

 

 

단종 원년인 1453년 숙부인 수양 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켜

국권을 장악하고 단종을 위협하자 단종3년(1453)에 상왕으로 물러났다.


세조2년(1456) 6월 집현전 학사 성삼문, 박팽년 등이 상왕복위 사건으로 참형을 당하였으며,

다음해 6월 21일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었고

그 다음날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2개월 남짓 기거하던 중 홍수로 인하여 관풍헌으로 옮겼다.

 

세조3년(1457) 여섯째 삼촌 금성대군 유의 단종복위 계책이 발각되자

노산군은 폐서인廢庶人이 되었고 그해 10월 24일 사사賜死되었는데 그때 춘추 17세였다.

 

 

 

 

능선에 자리를 잡고 앉아

국장행렬이 정자각에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자세히 볼 수는 없어도 시원스레 한 눈에 잘 보이겠는데....

 

 

 

 

국장재현행사인 '천전의'가 치러질 정자각 앞

 

능 아래로 제를 올리는 '정자각'이 있고

저 멀리 오솔길을 따라 우측으로 가면 남편과 아이들의 조상이기도 한

영월 엄씨 가문의 가장 훌륭한? 조상인 충의공忠毅公 '엄흥도 기념관'이 있는데

이번에는 시간이 부족해 들려보지 못했다.

 

 

아이들 초등학교 다닐때 자기 조상과

조상 중 가장 훌륭했던 분을 적어오라고 하면 의례히 충의공 엄흥도嚴興道를 적어 보냈었다.

뭐~다른 분은 이렇게 이름 알려진 분이 없어서.....

 

 

 

 

 

'단종의 능'

 

 

단종의 유해가 동강에 흘렀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는 충정으로

옥체를 수습하여 선산인 동월지산(지금의 장릉)에 밀장密葬하였다.


중종11년(1516) 노산묘를 찾으라는 왕명이 있었고

중종36년(1541)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의 현몽에 따라 노산묘를 찾고 수축봉제 하였다.
숙종24년(1698)에 추복하여 '묘호'를 '단종'으로하고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단종이 승하하신지 241년 만에 왕실의 정례正禮를 되찾게 되었다.

 

 


능상의 석물들은 추복릉의 전례에 따라 후릉厚陵의 예를 본받아 행하라는 교지에 의하여

봉분주위에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이 각각 1쌍씩,

봉분앞에는 상석床石과 사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長明燈이 있으며

능 양쪽에는 망주석望柱石 2기와 문인석文人石 2기,

 석마石磨 1쌍이 있고 무인석武人石은 없다.(실록의 근거)

 

 

 

 

'단종 능'

 

풍수지리로 명당자리를 찾아 묘자리를 택한것도 아닌,

엄동설한에 땅이 다 얼어 팔 수 없었을 때 노루가 쉬었던 뛰쳐나간 따뜻한 자리에

시신을 묻다 보니 볕은 잘 들어서 그동안 춥진 않으셨을 것 같다. 

 

 

 

 

 

아이들 어릴 때 왔었으니까 한 17~8년 전인가?

그때만 해도 능이 이렇게 관리가 잘 되진 않았었는데....,

 46년 전부터 후세 사람들이 제향도 올리고, 오늘은 국장까지 치러드리니

단종대왕도 더 여한이 없으시겠다.

 

 

 

 

단종의 국장 재현 행사장 풍경~

 

그늘막이 쳐진 내빈석이 있는 저 자리에서

얼마전 수라간으로 판단되는 건물지와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도움말과 사진출처:다음검색

 

이에 영월군은 현장에서 장릉 수라간 발굴조사에 따른 자문회의를 개최한 뒤

기본 및 실시설계를 거쳐 올해 안으로 수라간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이름?...

 

 

 

각시붓꽃~

 

 

 

홍살문과 전각들~

 

 

 

좌측 신(영, 귀신?)이 다니는 길과 우측 인간이 다니는 길~

 

 

 

능 아래로는 장판옥, 수복실, 단종비각, 정자각이 쭉 이어져 있다.

 

장판옥藏版屋에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받친 268인의 위패를 모셔놓았고,
 수복실守僕室은 능과 경내를 관리하는 능지기가 기거하던 곳이다. 

 

 

 

 

 

 

 

'단종비각端宗碑閣'

 

영조9년(1733)에 어명으로 단종대왕능비端宗大王陵碑와

비각碑閣이 정자각, 수복실과 함께 건립되었다.

 

 

비석 앞면에는 " 조선국 단종대왕장릉朝鮮國端宗大王莊陵"이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단종대왕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영천靈泉'


이 영천은 장릉에 있는 우물로써 정조15년(1791)에

어명으로 영월부사 박기정이 수축하여 한식때 제정祭井으로 사용하였다.
보통때에는 조금씩 샘물이 솟았으나

매년 한식때 제향을 지낼때에는 물이 많이 용출하였다.

 

 

동전이 던져진 우물의 깊이는 1.5m 정도이며

하부는 화강석 돌담으로 둥글게 쌓여 있고 상부는 정방형이다.

 

 

 

 

조선시대 국장재현행사(4월28일)가 열린 '정자각丁字閣' 뜰

 

 

영조9년(1733년)에 건립된 정자각은

제전祭殿으로 집의 모양이 丁자 모양으로 건립되어

 배위청拜位廳이라고도 한다.

 

이 정자각은 북쪽을 향하고 있어

제향시 언덕 위 단종 왕능의 옆구리를 향해 절을 하게 되어 있다.

 

 

 

단종대왕의 국장재현행사를 지켜보고 있는 관람객들~

 

 

 

 

'엄흥도嚴興道 정여각旌閭閣'

 

이 비각은 엄흥도의 충절忠節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영조 2년(1726)에 청주에 세운 정여각을 영조 35년(1759)고향인 영월로 옮겼으나

허물어지자 1970년 지금의 위치에 옮겨 세우고 홍살문도 세웠다.

 

 

 

충의공 엄흥도 '정여각旌閭閣과 비'

 

 

충신 엄흥도가 영월호장寧越戶長으로 있을 때

단종端宗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유배되어 관풍헌觀風軒에서

조정에서 내린 사약을 받고 승하(1457년 10월 24일)하여 그 옥체가 강물에 버려지자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여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순조 33년(1833)에 공조판서로 추증되었고 고종 13년(1876)에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엄흥도는 가족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선산인 동을지산(장릉)에 묻고

단종이 입고 있던 옷을 가지고 계룡산 동학사를 찾아가

 생육신 김시습과 함께 그곳에다 단을 쌓고 초혼을 부르며 제사를 올린 후 종적을 감추었다 한다.

해서 동학사 숙모전에도 엄흥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장릉의 '단종역사관'

 

 

 

 

요즘은 장례문화가 간소화되고 매장에서 화장으로 점차 바뀌면서

우리 어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상여를 메고 동구 밖을 나서던

그런 민간 전통장례문화도 거의 사라지고 없다.

 

우리 남편과 아이들의 조상인 엄흥도 정여각과 기념관이 있는 '영월 장릉'은

이젠 민간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전통장례인

'조선시대 국장재현행사'와 단종 능에 제향을 올리는 단종문화제로

역사와 전통이 살아있는 전통역사축제장이 되고 있었다.

 

 

 

*조선시대 국장재현행사 바로가기:http://blog.daum.net/886462/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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