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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난고(蘭皐) '김삿갓(김병연) 묘'와 시비(詩碑)거리

by 신록둥이 2013. 5. 9.

 

 

 

       영월 노루목,

     난고(蘭皐) '김삿갓(金炳淵)묘'와 그의 시비詩碑 거리

 

 

       맑고 상쾌한 아침의 김삿갓 계곡길은

       한적하면서도 아름다워 드라이브 코스로도 그만이었다.

       산골짜기여서 그때까지 남아있던 벚꽃 가로수들과 계곡을 끼고 이어지는

       아름다운 수채화같은 풍경이 우리를 반겼다.

 

       이른 아침이다 보니 '김삿갓 문학관'도 문을 열지 않은 시간대라

       길가에 자리한 김삿갓 시비거리와 그의 묘지를 둘러보며 우린 산골짝의 맑고

       깨끗한 아침공기를 온 몸으로 호흡, 그의 삶과 詩세계에 잠시 젖어 보았다.

 

 

 

 

방랑시인 '김삿갓'

 

 

 

김삿갓 문학관과 생가, 묘지가 있는

노루목으로 접어 드는 길....

 

 

 

'김삿갓橋'

 

다리를 건너면 김삿갓의 시비詩碑 거리로 쭉 꾸며 놓았다.

 

 

 

 

김삿갓 문학관과 묘로 이어지는 이 계곡길과

고씨동굴과 영월로 이어지는 주변 풍경은 정말 아름답다.

 

 

 

 

 

김삿갓 시비거리~

 

 

 

초입의 '정암 박영국'선생 비


이분은 감삿갓이 이곳까지 찾아온 내력과

 그가 샆던 집터와 묘를 찾고 유시를 수집하여 책자를 발간하는 등

김삿갓 유적의 발굴과 보전을 위해 평생을 받친 분이다.

 

 

 

 

김삿갓의 시비들을 쭉 세워

방랑시인으로서의 그의 문학관과 생애을 보여준다.

 

 

▼삶이 녹아있는 그의 詩 세계로 잠시 들어가 보자!

샘물을 떠 마시다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읊은 시로...

 

 

 

허연 머리 너 김진사 아니더냐
나도 청춘에는 옥인과 같았더라
주량은 점점 늘어 가는데 돈은 떨어지고

세상 일 겨우 알만한데 어느새 백발이 되었네.

 

 


 

 

 

'자영'


겨울 소나무 외로운 주막에
한가롭게 누웠으니 별세상 사람일세.
산골짝 가까이 구름과 같이 노닐고 개울가에서 산새와 이웃하네.
하찮은 세상 일로 어찌 내 뜻을 거칠게 하랴.
시와 술로써 내 몸을 즐겁게 하리라.

 달이 뜨면 옛 생각도 하며 유유히 단꿈을 자꾸 꾸리라.

 

 

 

 

시비에 새긴 그의 시어들을 들여다 보다보면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그의 심정이 절로 마음에 와 닿아....

 

 

 

 

 

 

 

 

 

 

 

 

 

 

 

 

 

'환갑'


저기 앉은 저 노인네 사람 같지 아니하고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인가 하노라.
슬하에 일곱 자식이 모두 도둑놈인 것이

하늘에서 복숭아를 훔쳐다가 잔치를 빛내 누나!!

 

 

 

'성황당'

 

성황당 앞에는 샘물이 있고

좌측 위로는 김삿갓 생가로 이어지며

우측으론 묘지가 있다. 

 

 

 

 

 

 

 

 

아침 빈속에 마신 이 샘물이

온 몸을 깨웠다.

 

 

 

다른 일정이 있는 우리는

이 생가 방문은 다음 기회로....

 

 

 

 

 

가을을 맞아 소슬한 바람에

사방으로 흩어져 날려가는 낙엽의 쓸쓸함을 읊은 시....

 

 

소슬바람에 나뭇잎이 우수수 소리없이 떨어지니

 산골짜기에도 쌓이고 시냇물 위에도 떨어지누나!
새처럼 아래위를 훨훨 날다가는 바람결 따라

저마다 동과 서로 흩어지네.


본디 잎새아 푸르르건만 누렇게 병들어

푸른빛 시샘하는 서리를 맞고 가을비에 더욱 애처롭구나!
두견새야 너는 어찌 그다지도 정이 박약하여

지는 꽃만 슬퍼하고 낙엽에는 안 우느냐!!

 

 

 

 

묘지와 버들고개로 이어지는 길~

 

 

 

 

 

 

 

 

 

 

 

 

김삿갓 묘지~

 

난고蘭皐 김병연(1807~1863, 김삿갓)의 생애

 

안동 김씨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선평宣評'의 후예로 순조 7년(1807) 3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화천면 회암리에서 부父 '안근安根'과 모母 '함평 이씨李氏'사이에서

이남二男으로 출생하였고, 본명은 병연炳然이고 호는 '난고蘭皐'이다.


김병연(순조7년~철종14)은 선천부사였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 투항한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게 되자

노목 김성수의 구원으로 형 김병하와 함께 황재도 곡산谷山에 숨어 살았다.

 

그러나 김익순에 대한 문제는 본인에게만 묻고 가문을 폐문한다는

조정의 결정이 알려지면서 모친과함께 황새도 곡산을 떠나

할머니가 계시는 광주를 거쳐 이천, 가평을 전전하다가 평창을 거쳐 영월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러허게 김병연의 모자는 묵숨을 연명할 수 있었으나

떳떳한 사대부로 지낼 수 없는 실정이었다.

 명색이 반역죄로 조부인 김익순이 능지처사를 당하였고 집안이 폐적을 당했기 때문이다.

 

 

 

 

 

 

시비 거리와

멀리 김삿갓 문학관이 보이는 노루목 마을풍경~

 

 

 

 

 

문중에서 거의 추방된 이들 모자는 위와 같은 이유로 산속 깊은 곳에서

권문세족임을 밝일 수 없이 살아가야 했다.

영월에서도 가장 인적이 드문곳을 택하여 생활하면서

班家의 기풍과 안목을 갖춘 김병연의 어머니 함평 이씨는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가문의 내력에 대한 소상한 진상을 알지 못한채 학업에만 정진을 하여 온 김병연은

훗날 영월도호부 과거(백일장)에 응시하여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牛天(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 - 홍경래의 난 때 순절한

가산 군수 정공의 충심을 논하고 항복한 김익순의 죄를 규탄하라)" 이라는 시제 아래 장원급제를 하였다.

 

뛰어난 글 솜씨로 장원을 하게 된 난고 김병연은

어머니로 부터 집안 내력에 대한 일들을 전해 듣고 조상을 욕되게한 죄인이라는

 자책감과 폐문한 집안의 자손이라는 멸시로 인해 20세 무렵

처자식을 둔 채 방랑의 길을 시작 하였다.

 

 

 

 

'김삿갓 묘'

 

이때부터 난고 김병연은 죄인의식으로 푸른 하늘을 바로 볼 수 없다 하여

삿갓에 죽장竹杖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금강산 유람으로 방랑의 생활을 시작하여 서울, 함경도, 항해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재주도를 돌았으며 도산서원 아랫 마을과 황해도 곡산 등지에서 몇 해 동안 훈장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863년(57세)에 전라도 화순군 동복땅에서 한 많은 삶을 마감하였다.

 

 

 

그 당시 전라도 동복땅에 묘를 썼으나,

삼년 후 둘째 아들 익균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모셨다 한다.

 

그러나 익균이 아버지 김삿갓의 초분지를 찾아 이곳 영월군 김삿갓면(옛 하동면)

노루목 마을에 이장했다는 기록은 있었지만 그후로 오랜동안

김삿갓(김병연)의 묘는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116년만에 정암 박영국 선행이 찾아내 보존해오다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도움말:시비詩碑 거리 안내문

 

 

 

 

 

김삿갓은 방랑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삶과 서민들의 애환을 詩로 읊어

조선시대 서민문학의 큰 틀을 마련하였다.

 

 

 

 

걸식을 하다 냉대를 받고

나그네의 설움을 표현한 그의 시에는 방랑자로서의

그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었는지를 잘 말해준다.  

 

 

스무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에게

망할 놈의 동네에선 쉰 밥을 주는구나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오

고향집에 돌아가 설익은 밥 먹느리만 못하리라

 

 

 

설움을 조금이라도 달래주려는 듯

그의 시비 앞에는 할미꽃이 소복이 피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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