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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흥선대원군이하응의 사저 운현궁>지금은 아이들의 전통예절교육장으로....

by 신록둥이 2011. 9. 30.

 

   

 

    '운현궁(雲峴宮)'

 

    '운현궁' 하면 김동인의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이 먼저 떠 오른다.

    읽은지 하도 오래되어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대원군 이하응이 김씨들의 세도정치 시기에 살아남기 위해

    상가집 개로 주정뱅이로 세월을 보내며 끝까지 살아 남아

    둘째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 처세술에 능하다고 해야하나? 무습다고 해야하나?

    암튼 이 운현궁은 조선말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산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정치적 무대였다.

 

       

'금남지역이었던 이로당에서 생활다례 체험중인 유치원생들'

 

 

옆 블록에 있는 인사동를 다닐때도

주위 가볼만한 곳을 검색하면 이 운현궁이 뜨곤 했는데, 

남편 심부름을 다녀오다 근처를 검색했더니 이 운현궁이 또 뜨서

    이번에는 정말 한 번 가보자 싶어, 

서울 생활 몇 십년만에 처음으로 운현궁을 찾았다.

    24일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재현행사도 이 때 얻은 정보로 다녀왔었다.

 

 

'운현궁'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로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은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이며 흥선대원군의 사저이다.

 한국근대사에서 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며  흥선군 이하응이

왕실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로의 개혁의지를 단행한 곳이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내외에 행사한 곳으로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였기 때문에 역사적 상징성이 더욱 크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였다.

 

 

 

 

한일합방으로 1912년 황실재산 몰수로 소유권이

국유화 되었다가 

1948년 나라와 법정공방 후

  대원군의 5대손 이청(李淸, 1936- )씨에게 운현궁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그러던 것이 1991년 운현궁을 유지, 관리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면서

  이청씨가 양도 의사를 밝힘에 따라 서울시에서 매입하여

  1993년 12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하여 개방하고 있다.

 

'수직사'

 

입구를 들어서면 우측으로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거쳐하던

수직사가 눈에 들어온다.

당시의 운현궁은 상당히 넓어 관리에 많은 인원이 필요했었다고 한다. 

 

 

'노안당의 솟을 대문'

 

 

'노안당'

 

정면 6칸 측면 3칸의 운현궁의 사랑채로 대원군의 일상 거처였으며

파격적 인사정책, 중앙관제복구, 서원철폐, 복식개혁 등

국가주요정책을 논의했던 곳이다.

말년에는 정권에서 퇴진 79세의 나이로 이 곳에서 눈을 감았다.

 

전형적인 우리나라 한식 기와집으로

처마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을 단 것은 이 곳만의 특징이다.

 

 

 

'노안당(사랑채) 내부'

 

'난을 치는 흥선대원군'

 

흥성대원군은 친척인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글과 그림을 배웠고 墨蘭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평상시 복식인 원정관에 도포를 착용하고

추사의 글로 만든 병풍 앞에서 묵란을 그리고 있다.

 

 

'봉사식'

 

봉사식은 흥선대원군의 아들을 왕으로 정하는 교서를 받는 의식으로

 영의정과 도승지가 참여한 가운데 치러졌다. 

 

 

'당시의 가죽신'

 

 

노안당의 마루방에서 

종이접기에 열중인 유치원아이들과 선생님들~ 

 

 

 

'노락당'

 

정면10칸 측면 3칸으로 노안당보다 크고 웅장하며

툇마루 좌우에 방이 아홉칸이나 있을 정도로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고종과 민비의 가례와 가족의 회갑이나 잔치 등 주요행사 때

사용되었고, 명성황후가 삼간택이 끝난 후

왕비수업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부엌'

 

고종이 왕 위에 오른 뒤

상궁과 나인이 운현궁에 배치되어 살림을 도왔다.

 

 

 

 

 

명성황후가 세자들과 부대부인 생신축하 방문을 해

즐겁게 보내고 있는 모습

 

'우측 조대비와 정면 철종비, 좌측은 부대부인과 상궁'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운현궁을  대대적으로 보수 증축하였다.

조대비와 철종비가 궁중 소례복인 보를 부착한 당의를 착용,부대부인과 함께

노안당과 노락당의 낙성을 축하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밥과 찬을 준비하는 부엌외에

술이나 떡을 만드는 등 찬기를 보관하는 곳으로 보인다.

 

 

'노락당 남행각'

 

 

'남행각 내부모습'

 

 

 

 

'노락당 북행각'

 

 

 

'二老당'

 

'두 노인이 기거하는 곳'이란 뜻을 가진 이 곳은

정면 7칸 측면 7칸으로

바깥남자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입구자(ㅁ)모양으로 된 건물로

가운데 中庭(건물과 건물사이의 마당)이 있고

  노락당과 더불어 안채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어

여지들만 살 수 있게 별도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철저한 금남지역이엇으며

이로당 안주인은 운현궁 전체 안살림의 최고책임자가 되었다.

 

 

'이로당 中庭과 동행각'

 

 

'이로당과 이로당동행각과의 연결 통로'

 

 

 

신을 벗고 전각으로 오르면 

한쪽에서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유치원생들이 전통예절교육으로 

절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고....

 

 

여자아이들이 큰절하는 법을 배우고 익히는 동안

남자아이들은 한 켠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남자 큰절은 여자와는 또 다른 예법이라....

 

 

한 쪽에서는 다소곳이 앉아 생활다례법을 배우고 있었다.

 

외국인 남자선생님의 앉아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아이들처럼 양반다리로 앉아 있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ㅎㅎ 

 

 

개별 찻상과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아이들 모습이

어찌 저리도 의젓해 보이고 예쁜지....  

 

우리는 어렸을 때

받아 보지 못한 예절 교육인데....,

유치원을 안 다녀서 그런가?....ㅎㅎ

 

저렇게 어릴 때부터 몸에 익히고 배운다면

바른 생활태도도 갖게 되고

우리문화에 대한 긍지도 갖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이 이 예절. 문화교실을 운영하는 목적이다. 

 

 

'이로당 뒤안의 모습'

우물과 절구의 모습도 보인다.

 

 

'유물전시관'

 

이로당 마당을 나오면 유물전시관이 있는데

운현궁과 대원군 관련 유물전시를 통해 

역사속의 운현궁이 지녔던 가치와

한국근대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한 

전시연출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대원군 초상화'

 

'교지와 노락당의 상량문'

 

 

 

 

'친영례복식과 상궁의 청록색 당의와 명성왕후의 홍색 노의'

 

 

'운현궁 야외 특설무대'

 

일년에 두번(4월, 9월) 있는

지난 주 24일 열렸던 고종과 명성후의 가례 재현행사 등 

10울 30일까지 있는 일요예술마당도 이곳에서 열린다.

 

 

 

 

운현궁의 사계를 한눈에 감상할 수 았다.

 

 

 

 

우리의 문화을 알리는 각종 문화.체험행사와

교육프로그램인(한글.한문서예와 규방공예, 자수,

닥종이 공예 등) 성인들을 위한 문화교실과

유치부 부터 교포, 유학생들을 위한   

전통예절과 국악예절교육도 운영하고 있다.

 

 

 

조선말에는 파란만장한 역사 속 소용돌이의 핵이었운현궁이었지만

이제 이곳은 이렇게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뛰어놀고

우리 조상의 얼이 담긴 전통예절을 배우는 교육의 산실인 

소중한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도움말: 운현궁 홈페이지

*운현궁 바로가기:http://www.unhyeongung.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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